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건 침입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꿈을 증언하고자 한다면 그건 스스로 장치가 되려 한다는 뜻일 것이다. 꿈을 말하는 일은 언제나 살해를 동반한다. 꿈에 대한 최초의 인상, 그 어쩔 수 없이 강렬한 감각은 말이 되는 순간 부드럽게 살해된다. 당신에게 남는 것은 그 인상을 살해한 언어다. 그 언어가 지닌 살의에서 거꾸로 꿈을 더듬어 읽어 내려가기 위해서는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이때 꿈은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는 무언가로 변환된다. 만일 누군가가 꾼 꿈을 말로 설명하고 그것을 녹음한다면 거기서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녹음된 음성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 음성이 떨리거나 매끄럽지 않거나 조급해지거나 머뭇거리는 순간의 진동을 기록하는 일에 꿈을 기억하는 일과 유사한 개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매끈하지 않은 음성에서 꿈의 인상을 거꾸로 읽어 내려가는 건 비록 어렵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다.

<유령 좌표 Phantom Coordinates>는 관객에게 수집한 꿈을 직접 재생하기 위해 포노그래프라는 장치가 될 것을 제안한다. 포노그래프(Phonograph)란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초기 음향 재생 장치로, 사람의 목소리를 실린더에 새기고 바늘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이면서 소리를 재생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런 구조다. 어떤 사람이 호른에 대고 ‘안녕’이라고 외친다. 그 외침은 공기를 진동시킨다. 공기의 진동이 바늘로 전달되고, 바늘은 왁스나 주석이 코팅된 실린더 표면에 홈을 새긴다. 이제 실린더를 다시 회전시키면 바늘이 새겨진 홈을 따라 움직이면서 진동판을 흔들고, 다시 호른을 통해 그 소리가 증폭되면서 ‘안녕’이라는 음성이 들린다. 포노그래프는 ‘안녕’이라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 말이 한 사람의 성대에서 빠져나와 울려 퍼진 그 순간을 재현한다. 소리의 층위에서 보자면 과거를 기억하고 재생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 장치에서 중요하면서도 영원히 미지인 것은 소리가 촉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포노그래피를 발명한 에디슨의 일화에 의하면 어느날 그의 손가락이 진동하는 바늘에 찔려 피가 났다. 그때 에디슨은 진동판이 발휘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귀의 기능을 촉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당신이 녹음된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에는 여전히 바늘의 날카로움이 남아있다.

당신은 koldsleep이라는 이름의 흰 방에 도착한다. 방 안에 있는 것은 한 사람을 포노그래피로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다. 흰 침대와 한 대의 MP3 플레이어, 흰 스툴 위에 놓인 스탠 재질의 납작한 오브제들. 이 사물들이 놓여 있는 방식은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이지만 흐트러진 물건들이 만드는 배치의 우연한 아름다움 같은 질서가 있다. 이 방 안에 발을 디딘 당신은 무엇을 가장 먼저 집게 될까? 우선 당신은 문 앞에 놓인 종이를 가져가 읽을 것이다. “포노그래프 지침”. 그 지침을 따라 우선 자유로운 자세와 순서로 눕거나 앉아 MP3에 녹음된 재생목록 중 하나를 듣는다. 재생목록에는 여덟 개의 꿈이 녹음되어 있다. 낯선 이가 자신이 꾼 꿈을 설명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 위로 한 박자 느리게 맴도는 한 여자의 음성이 있다. 두 음성은 약간의 시차를 가지고 겹쳐지지만, 자연스러운 반향처럼 들린다. 마치 소리가 공기중에서 울려 퍼지듯이. 주변을 둘러보면 스테인리스 재질의 납작한 오브제들이 있다. 한 면에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고, 반대 면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그 글씨는 당신이 듣고 있는 꿈을 문자로 변환해 새긴 것이다. 당신은 그 문자가 새겨진 길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차가운 스텐 위에 새겨진 홈에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진동의 경로를 익힌다. 당신은 눈을 감고 MP3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의지해 꿈을 청취할 수도 있고, 그와 동시에 새겨진 문자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귀의 기능과 촉각의 기능을 긴밀하게 연결해 볼 수도 있다. 귀로는 꿈 목록 중 하나를 듣고 손으로는 여러 개의 오브제를 번갈아 들춰보면서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불일치를 가져다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손과 귀에서 발생하는 진동에 감각의 가장 예민한 끝을 기울여 본다. 이곳의 사물들이 차갑거나 날카로운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니, 안심하고 따라도 좋다.

꿈을 듣고 만지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면 이제 그다음 할 일은 여덟 개의 꿈 중 하나를 골라 MP3에 녹음하는 것이다. 당신은 “녹음의 결과물보다 포노그래프가 되는 경험에 집중하세요”라는 지침을 읽는다. 그리고 “포노그래프가 되는 경험”에 대해 생각한다. 그건 당신이 듣고 만졌던 꿈의 루트가 당신의 기억에 새긴 홈을 따라, 그 방향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일을 의미한다. 이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신은 당신이 방금 들은 그 꿈이 어떤 이의 꿈인지 모르고, 그 이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그 꿈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알지 못한다. 각각의 꿈은 강북구에 실재하는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당신은 솔밭공원과 프린트 카페와 우이천과 컴폴커피와 진숙빌라, 녹지빌라, 장미원시장, 북서울꿈의숲을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각각의 꿈이 증언하는 꿈의 비개연적 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평소 알던 공간과 약간은 다른 분위기와 냄새가 나지만 그 사실을 당연히 여긴다던가 공간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전환되지만 문 손잡이를 돌려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결로 느껴진다던가 사소한 공간이 무척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가 된다든가 하는 일이 당신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장소의 성질과 위상 변화는 당신의 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당신은 어렴풋한 익숙함 속에서 그 꿈의 사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건을 고른다. 당신을 숙련된 탐정으로 느끼게끔 해주었던 것.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아아 가다듬고 녹음 버튼을 누른다.

포노그래프가 되는 경험이란 여기서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당신의 귀와 눈, 손으로 접촉했던 그 꿈의 스크립트를 당신의 목소리로 재현하게 될 때, 당신의 기관과 육체 자체가 하나의 기계가 되는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노그래피가 바늘에 홈을 새겨 소리를 녹음하고, 새겨진 홈을 따라 바늘이 미끄러지면서 소리가 재생되는 것처럼 당신의 몸은 꿈과 접촉해 각각의 꿈의 서사들에 몸을 익숙하게 만들고, 그 익숙함을 따라 당신의 몸에서 소리가 재생되듯이 꿈의 내용을 낭독한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낭독하는 꿈의 스크립트가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말을 그대로 전사한 것처럼 입말이 살아있다. 어 음 이제 그니까 그래가지고 뭐 그게 좀 말끝을 흐리거나 반복되는 추임새나 그 다음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했던 말을 반복하는 언어의 무의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기입되어 있다. 당신은 그 문장을 변형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대로 낭독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의식적인 말버릇을 의식적으로 따라하면서 당신은 이 단순해 보이는 모방이 실은 타인이 되는 체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된다.

당신이 그 흰 방에 있는 동안, 같은 일이 당신의 몸뿐 아니라 당신의 기억 속에서도 일어난다. 포노그래프가 된다는 것은 당신의 기억이 오로지 당신의 기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이다. 당신은 그 꿈의 서술 방식이 낯설지 않다. 당신도 당신의 꿈을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문체로 말해본 경험이 있을 테니까. 장소에 대한 이상하면서도 고유한 왜곡을 동반하는 꿈의 체계는 당신의 꿈속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억에는 이미 꿈의 경로가 새겨져 있다. 기억의 표면에 파인 홈을 따라 꿈의 서술은 힘들이지 않고 미끄러지고, 당신은 마치 당신 자신의 꿈을 받아들이듯이 타인의 꿈과 접속하게 된다. 꿈의 보편성은 꿈이 가진 유일무이한 개성이다. 그 속에서는 누구든지 주인 없는 꿈을 꿀 수 있다. 당신에서 우리로 향하는 꿈.

옥타비오 파스는 “사슬에 묶인 사람이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폭발시킬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고, 그 말을 따라 루이스 부뉴엘은 “스크린의 하얀 눈꺼풀이 반사시키는 빛만으로도 우주를 폭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장소에 가지 않고 그 장소에 연루된 꿈의 서사를 재생하는 것만으로도 장소의 지형을 새로 그릴 수 있다. 한 마을의 질서가 완전히 새로 쓰인다. 내 마을을 날려 버려.[1] 우리가 만든 꿈의 지형 속에서 마을의 시간은 영원히 새벽이다. 사방에서는 달큰한 냄새가 나고 아직 공원으로 변하기 전의 유원지에서, 우리는 긴 수영을 마친 뒤의 몸처럼 나른해진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발소리를 피해 달아나려 하지만 몸이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하얗게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의 긴 행렬이 빌라를 끝없이 빠져나온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들은 공원으로 향하고 공원에는 분홍색 잎이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 그 잎에서는 달큰한 냄새가 난다. 장소들은 우리의 꿈속으로 영원히 복제되었다. 우리는 산책하는 기계가 되어.

[1] <내 마을을 날려 버려(Blow Up My Town)>는 샹탈 아커만이 1968년에 만든 단편 데뷔작의 제목이다. 이 영화에서 날려 버리는 것은 마을이 아니라 부엌이다. 여자는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된 부엌을 파괴하고 발랄한 해방을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