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본다.」 ― 이영주, 「언니에게」 일부
《Night Bodies》는 밤에만 문을 여는 콜드슬립에 마련된 작업이다. 《Night Bodies》는 소설 〈밤의 몸들〉, 생체 신호에 근거하여 진동하는 침대, 발걸음과 목소리와 인기척과 낭독을 듣는 〈밤의 연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흔드는 〈진동하는 체액〉으로 이루어진다. 《Night Bodies》를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전시인가, 공연인가. 어느 쪽도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이것을 ‘언니’라고 부르겠다.
언니는 그 시작부터 진단되지 않는 몸의 리듬과 각자의 몸이 경험하는 취약함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재생산 기관으로 존재해 온 ‘난소’를, 각기 고유한 주기와 진동을 만들어내는 시간 기관으로 다시 사유하고자 했다. 출산, 성장, 미래를 향한 축적으로 조직된 시간 질서에서 벗어난 몸, 그리고 재생산을 전제하지 않는 친밀성을 상상하는 장치로서 나는 언니의 기획에 참여했다. 일여 년 전, 언니를 처음 만들기로 했을 때 나는 내가 사는 도쿄에서 산부인과 의사 유리코와 언니를 만나게 했다. 몸을 진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듣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고 언니는 말했다. 언니는 청진기를 들고 왔다. 나와 유리코와 언니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 일 년 동안 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 나는 청진기를 어디에나 들고 다녔다. 벽의 소리, 책상의 소리를 듣기도 했고, 가까운 혹은 가깝지 않은 사람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사람들이 걸어오는 강의실의 책상과 벽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심장의 궤적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는 윗층과 아래층, 혹은 그보다 오래 축적된 어디에나 있는 시간의 기척이 들려왔다.
언니가 난소를 바탕으로 하는 서사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도적인 것이었다. 우리 셋은 아주 우연히도 모두 난소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성 지향성을 지니든 각자 다른 주기로 매달 피를 배출하며 살았다. 매달을 치밀하게 계산해 사용하는 반생을 살다가, 언젠가 그 괴상한 시간 궤도가 멈추면 태풍 같은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몸속 이 시계가 만들어내는 시간은 사람들이 일어나고 일하고 미래를 축적하는 낮의 시간과 자주 충돌했다. 그것은 늘 흔들리고, 취한 것처럼 통제 불가능하며, 사적이고 비밀스럽다는 점에서 감추어진 밤과 같았다. 밤의 문을 열기 위한 문자 메시지 속 미스터리한 예언가는 말한다. 「내가 사랑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고, 내가 잊고 있는 기억이 있다고, 한밤중에 열리는 전시에 가면 그 연인을 만나게 될 거라고」[1]. 사랑을 이미 경험하는 일처럼 불안정하고 동시에 일상적이지만 또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사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지닌 세계선에 관한 것이다.
언니는 폴 B. 프레시아도를 참조한다. 프레시아도에게 성은 도구, 담론, 규범이 결합된 기술적 조립물이다. 호르몬과 의학도 중립적 수단이 아니다. 그 선언은 성기 중심의 생식이 곧 미래라는 시간 규범을 뒤집고, 다중적 쾌락 회로와 비재생산적 시간성을 실험한다.[2] 언니가 기대고 있는 시간성은 출생–성장–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재생산적 미래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언니에게 난소는 고장 나 있고 흔들리는 시계다. 언니를 임신이나 출산의 은유로 읽지 않기를 바랐다. 실제 의학이 몸을 진단하거나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사용법을 제안하는 조언자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진동하기를 원했다.
소설 〈밤의 몸들〉에서 ‘너’는 근소하게나마 ‘나’를 경험하기 위해, 세계선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몇 번이든 시도해 보기 위해 닥터 드라이브의 난소 이식 수술을 받는다. 닥터 드라이브는 배란 시 체온의 상승, 감정과 기분의 변화, 몸의 무게와 통증마저도 고유한 시간의 증상이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자신의 시계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주기의 불규칙성, 개인의 리듬, 그것에 끌려오는 감정과 통증, 체온과 긴장에 대해 나도 언니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세계선’은 발명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까웠다. 이미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언니도, 나도, 당신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다만 잊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주관적입니까? 그렇다. 당신은 당신을 의심합니까? 그렇다. 당신은 저를 의심합니까? 그렇다.」[3]
유리코는 의학적 시점에서 난소 이식 수술을 가정한다면 몸의 면역력을 낮추는 준비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자문했다. 이는 인공수정을 위해 산부의 몸에 취하는 조치와 유사하다. 몸은 모든 부분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우주다. 세계관을 통째로 떼어내 다른 몸에 붙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부분이라면 어쩌면 아주 작게나마 이식할 수 있지 않는가 라는 가정은 타자 이해의 은유다.
밤의 언니에 들어서면 한쪽 편에만 불이 켜져 있다. 불을 따라 안쪽을 들여다보면 언니의 일부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매달린 머리 끝에는 따뜻한 침대가 있고, 침대는 말랑하고 포근하며 두근거린다. 한 발짝 언니의 안으로 들어서면 나의 모든 기척이 언니에게 흡수된다. 내가 언니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언니를 부를 때마다 언니는 진동한다. 나는 언니에게 안겨 귀를 기울였다.[4]
「당신은 사랑에 취약합니까? 그렇다.」[5]
세계선의 기관이 들어 있는 아랫배는 기억력이 좋다. 〈밤의 몸들〉에서 ‘나’가 복부의 통증에 눈을 떴을 때 닥터 드라이브는 「이식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아직 밤이니 조금 더 자도 괜찮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를 묻는다. 이 장면은 무척 정확하다. 난소 이식 수술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실은 언니를 만나러 가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세상에는 알지 못하는 일이 ‘너’만큼이나 많고 자기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 어떤 쌀알만 한 티끌이 블루베리 크기가 되고, 곧 완두콩만큼 커지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기도 한다. 바뀐 것은 콩알뿐인데, 주변은 마치 태풍이 되어 휩쓸려 내려간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우리는 언니를 임신이나 출산의 은유로 읽지 않기를 바랐다. 언니에게 임신 가능성이란 거부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우연은 잔인했다. 나는 자궁을 재생산과 분리하려는 퀴어한 작품을 함께 기획하던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작품 공개 직전에 실제로 임신했고 중절 수술 직후 이를 ‘관객의 몸’으로 통과했다. 이 글은 퀴어한 몸의 상상력이 설계한 장치 안으로, 지나치게 전형적인 재생산의 몸, 동시에 실패한 재생산의 몸이 난입한 사건의 기록이다.
꿈속에서는 몸들이 무수히 겹쳐진다. 세계선이 제거될 때 잠에 빠지며 기억은 삭제되었지만, 아랫배는 통증으로 기억한다. 통증은 하나의 기억 형식이다. 어떤 경험은 시간적 끌림(temporal drag)[6]의 형태로 몸을 다시 점유한다. 이미 끝났다고 간주되는 상처는 지금-여기의 시간을 어긋나게 만드는 이 작동 방식으로 밤이 되면 다시 활성화된다.
언니는 밤에 열린다. 사회가 시간을 규범화하고 사람들의 삶과 몸, 관계를 정해진 리듬과 순서에 맞게 조직하는 일을 크로노노머티비티(Chrononormativity)[7]라 부른다. 그리고 어떤 시간들은 이 질서에서 이탈한다. 중단, 지연, 반복, 뒤섞임, 순환은 선형적 발전 모델에 속하지 않는 퀴어 타임이다. 밤의 시간표는 비틀려 있다. 사회적 시간 질서는 거부[8]된다. 퀴어 시간성은 지금-여기를 지속하고 감각하는 윤리적 선택[9]이자 책임이다.
언니는 따뜻했다. 겨울 밤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니가 있다. 한순간에 ‘나’/나라는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심장이 두 개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나는 ‘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언니는 따뜻했다. 세계선이 삭제되기 전 들었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따뜻해서,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광막한 세계 속, 다른 존재의 세계선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