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두 번 잊을 만하면 [채널헤드 통신]이라는 말머리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정형화된 안부 인사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알쏭달쏭한 공연이나 전시를 제안하며 콜드슬립이라는 장소를 찾아오라는 초대장이다. 콜드슬립과 채널헤드 통신의 관리자는 김미현으로, 그의 초대에 한 번이라도 응했던 자는 아무런 사전 정보가 주어지지 않아도 그가 꾸미는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대한다. 공연, 전시, 때로는 파티... 이런 최소한의 소개조차 없을수록 더욱 좋다. 왜냐하면 김미현이 행사의 주최자로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관습적인 예술 형식에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연이라면 공연이라 하지 못할 까닭이 없고 전시라면 전시라 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이상한, 아름다운, 초과와 잉여의 차원이 있다. 우리가 채널헤드 통신의 느닷없는 메시지에 가슴이 뛰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명명 가능성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예기치 않은, 이상한, 아름다운, 사건을 다시 향유할 수 있으리라 고대하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명명의 범주를 초과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말하기를 곤경에 빠뜨린다. 콜드슬립에서 나오자마자, 너무나 벅차, 너도 나처럼 이 아름다운 것을 겪고 행하라고 타인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은데,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콜드슬립의 내부는 마치 전시장처럼 여러 오브제가 설치되어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은 관람객으로서 그저 둘러보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만지고, 뒤집어보고, 열어젖히고, 이것저것 누르며 작동시켜도 된다는 허락을 얻는다. 이 장소와 사물들에는 관리자가 설정한 약간의 허구적 서사가 드리워져 있으므로, 그의 지시적 대본을 충실히 따르거나 자의든 고의든 위반하면서, 우리가 여기에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은 모종의 연극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콜드슬립이라는 전시장 겸 극장에서 사물들과 함께 드라마를 만드는 예술적 행위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그렇다면 콜드슬립에서의 공연은 몰입형 연극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주어진 한두 시간 동안 여기서 겪고 행하는 것은 완전한 가상이라기보다는 그 서사와 함께 그 시간만큼 살아낸 우리의 삶 자체이다. 콜드슬립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삶의 한 조각을 실제로 산다. 결과적으로, 콜드슬립에서 우리는 전시만은 아닌, 공연만은 아닌, 극적 허구만은 아닌, 그러나 분명 미적인, 예술 형식으로서의 삶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말하기의 곤경을 넘어 우리가 우리 다음에 콜드슬립에 올 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정확하게 말한다면, 너 역시 이 차가운 잠의 장소에서 삶의 아름다운 한순간을 살라는 축복 어린 주문으로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기의 곤경을 축복의 주문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김미현의 작업은 고대 그리스의 미스테리아와 여러모로 상통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매년 특정 시기에 특정 신을 기리는 제전을 개최하여 시민들의 결속을 도모했다. 시민들은 누구든 연극, 운동 경기, 춤, 노래, 희생물 봉헌 같은 개방적 공공 행사에 참여하여 즐겼고, 이로써 집단 공동체라는 정치적 신체의 감각을 내화하면서 생활의 시간을 집단의 공통 리듬에 맞추어 조율했다. 이와 달리, 미스테리아는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구도적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여성, 노예, 외지인 등 사회적으로 억압되거나 배척받는 자들도 참여하여, 규범적 시민 집단의 동질적 신체에 자기를 일치시킬 필요와 의무 없이, 사적으로, 삶의 지향을 구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의례가 미스테리아이다. 사적 속성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지켜져야 하므로, 의례에 관한 모든 것은 비밀로 엄수되었고, 따라서 고대인들이 미스테리아 의례에서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오늘날에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필멸하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하기, 유한성으로부터 신체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정신적으로 해방되기, 그리고 상징적인 죽음을 거쳐 삶과 복을 다시 받아들여 누리기 같은 것들이 미스테리아 참여자들이 행하고 구한 것이리라는 학설이 있다. 규범적 시민성에 어긋난 자들도 삶을 살 자격이 있고, 영생의 세속적 시간성인 미래를 상상할 권리가 있으며, 그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미스테리아 의례의 배움과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달리 말해 이 비규범적 삶의 축복인 것이다.

콜드슬립은 이름에 걸맞게 잠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꿈, 환상, 몽유, 일탈, 즉흥, 계획에 없던 짓, 잠꼬대스러운 말처럼, 잠들었을 때 발생하는 것을 깬 채로 누리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라 다시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밤의 몸들을 만나기 위해, 밤의 몸들과 함께하는 미스테리아에 입문하기 위해, 콜드슬립의 문에 비밀번호를 입력해 들어서면, 사이드룸에 설치된 검은 콘솔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콘솔 위에는 이 장소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안내판과 작은 조명기구가 준비되었다. 우리는 마치 낯선 여행지에 밤늦게 도착해서 별다른 정보 없이 그저 가장 먼저 눈에 띄길래 들어간 무인 호텔의 숙박객이 된 느낌을 받는다. 고대 미스테리아 의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대지와 곡식의 신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를 숭배하던 것이었다. 페르세포네는 드넓은 꽃밭에서 친구들과 꽃을 꺾으며 놀다가 하데스에 의해 하계로 납치된다. 미스테리아의 참여자들은 눈물을 쏟으며 딸을 찾는 데메테르처럼 한밤에 횃불을 들고 페르세포네를 찾아 나서는 행위를 수행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마침내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해후가 이루어지지만, 페르세포네는 겨울마다 하계로 돌아가야 하며, 현대의 우리는 LED 조명기구를 들고 겨울과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여성을 찾아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겨울밤의 콜드슬립은 페르세포네가 결박된 하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장소이다. 사이드룸의 암막 커튼을 들추고 본격적으로 차가운 잠의 방에 들어서면 온통 검은 실내에 눈을 순응시켜야 한다. 작은 방과 다소 어울리지 않게 큰 침대가 있고, 작은 캐비넷 하나, 그리고 검은 액체가 담긴 용기를 설치한 철제 받침대 세 개가 눈에 들어온다. 모든 가구와 패브릭은 검다. 검은 시트로 덮인 침대 위에는 마구 해체된 신체가 매달리고 널브러져 있다. 콜드슬립의 방문객들은 침대 위 망가진 몸을 목도하며, 이것이 진실로 우리가 갈구하며 찾아 나선 것일까 자문한다. 천장에 매달려 침대에 쏟아지는 몸. 점액질스럽게 다소간 끈적이고 말랑한 물질이 덧발린, 윤기 흐르는, 차가운, 여성의 하반신과, 폭신폭신하고 부드럽고 말랑하고 묵직하거나 가벼운 내장 덩어리와, 묵직한 귀와, 얇은 막과 섬유 뭉치와, 늘어진 전선들... 우리는 침대 위에서 그것을 만지고,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어느새 거의 폭력에 가깝게 함부로 주물럭거리고, 이것저것 들어서 무게를 가늠하고, 만지지 말라는 것도 만지며 이미 갈기갈기 찢기고 파손된 것을 더 망가뜨릴 뻔한다. 우리가 여기저기 뒤지며 부스럭거리고, 떠들고, 김미현이 마련한 텍스트를 낭독하는 동안, 페르세포네의 귀는 우리의 소음을 흡수하여 방 안 곳곳에 설치된 기계 심장의 박동으로 번역한다. 방은 마치 변온동물의 신체처럼 우리가 더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더 따뜻해지는 것만 같고, 우리가 더 생기 있게 소리를 낼수록 원반형 접시의 검은 피는 우리 소리의 파동에 맞추어 잔잔하게 출렁인다. 결국, 페르세포네의 부서진 몸은 규범적 형상으로의 재조립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구하는 자의 소리, 움직임, 웃음, 생기에 반응하며 그 자체로 살아 있음을 말하려 한다. 말이 아닌 말로, 비밀스럽게, 감각하게 한다. 박동하는 밤의 방 안에서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모종의 환희를 느낀다. 규범과 정상의 몸이 아니어도 충분히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진리, 그 몸은 역시나 정상과 규범에 개의치 않는 다른 몸들과 어울리며 규칙화할 수 없는 리듬을 창발한다는 사실, 침대와 접시와 물과 헝겊이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그 리듬이 얼마나 심장을 울리는지, 불규칙한 심장 박동은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거 다들 잘 알지 않니, 여기서 우리는 꽃을 꺾으며 노는 페르세포네와 친구들처럼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고 만지고 적시고 묻히고 뒤적거리며 우리의 공동체를 결성하는데, 이 차가운 방은 이처럼 웃기고 이상한 몸들의 정치가 실현되는 행복한 하계라는 것, 그것이 김미현의 콜드슬립 미스테리아가 선사하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