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도착 직전까지도 콜드슬립에서 뭘 보게 될지 몰랐다. 물론 그래도 어떤 인상은 있었다. 이를테면 매일 오후 6시부터 새벽 4시라는 통상 전시 운영 시간과 전혀 다른 심야 시간에 그것도 1시간 단위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번 전시가 관람이 아니라 분명 어떤 체험에 보다 가까울 거란 예상이 그렇다. 공간 운영자이자 작가 김미현의 말처럼 심야 시간대라는 환경에서 신체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작동한다. 누군가는 새벽 감성이란 말로 조롱하곤 하지만 물질적 조건으로서 심야 시간대가 촉발하는 “정서적, 신체적 취약성”[1]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다행스런 보편적 인간 조건이다. 누구든 밤이 되면 자아 경계가 비교적 흐려진다. 밤은 꿈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이 위계도 규칙도 없이 엉망으로 뒤섞이는 카니발적/아나키적/반(反)공간적 시간대가 바로 동물로서 인간이 잠에 드는 심야 시간대다. 나도 이런 시간대를 좋아한다. 비록 삶의 모든 실수가 집약된 시간대라 하더라도 그렇다. 아니 오히려 실수라는 이름으로 나라는 존재가 반복하던 패턴을 배신하는 도약을 감행하게 만드는 시간대라 좋은지도 모르겠다. 잠재적/우연적/단절적 가능성(들)의 시공간으로서의 밤. 그렇다면 밤을 공공 인프라스트럭처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소수(자)/하위 문화에서 그러고 있듯이 말이다. 가까운 과거에 나는 비슷한 관람 조건을 강제하는 전시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근원적 시간인 자시(子時)의 개념을 공간으로 번역하려 시도했던 한 전시는 귀신이라도 환영할 기세로 공간의 내부를 깨끗하게 비우고 많은 몸들을 문자 그대로 맞아 들이고 있었다.[2] 그건 일종의 애도 의식이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도 밤이라는 시간은 전시의 필수적인 조건이자 자원으로 무한 리필 됐다. 한편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런 시간대에 전시를 한다는 작가의 결정에 의문을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다시피 밤은 내일의 노동을 위한 재생산의 시간이다. 그리고 또한 오늘날 테크노 자본주의가 침범하고 정복하려 애쓰는 잠이라는 궁극적인 비밀의 시간이기도 하다.[3] 이런 의미에서 심야 시간대의 전시는 관객에 의해 하필 그런 시간대를 고른 정당한(?) 이유를 요구받게 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했던 것처럼 말이다.
겨울이고 추웠고 출발 지역인 중구 을지로에서 도착 지역인 강북 수유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전시장이 제발 따뜻하길 바랐다. 마치 에어비엔비에 입장하듯 상가 건물에 위치한 콜드슬립의 철문 앞에서 김미현에게 문자로 받은 비밀번호를 눌렀다. 입장하자 예상보다 작은 공간의 내부가 드러났다. 지금부터 여기에 나는 혼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늑하게도 무섭게도 느껴졌다. 공간은 어두웠고 입구에 비치된 손전등을 비춰가며 전시에 대한 작가의 안내와 지시를 읽었다. 그런 정보를 통해 파악한 바는 다음과 같은데 우선 전시 공간 자체가 일종의 생체 기관처럼 실시간으로 작가와 관객의 신체 반응을 입력/출력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침대는 김미현의 생체 신호에 따라서 그리고 공간 귀퉁이에 설치된 인터랙티브 조각 〈진동하는 체액〉은 관객의 소리에 따라서 진동한다. 또한 침대에 설치된 사운드 조각 〈밤의 연인〉은 관객이 단편 소설 〈밤의 몸들〉을 소리 내어 읽는 동안 이를 녹음한다. 그러니까 관객의 직접적 개입 없이는 관람 경험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구조의 ‘의존형’ 전시다. 공간은 관객이 듣고 말하고 만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저 가능성(들)을 잉태하고 있을 뿐인 어둡고 추운 전원 꺼진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 이런 모든 시스템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작가 또는 관리자 김미현의 지시에 따라 나는 캐비넷을 열고 이북을 꺼내 침대에 고분고분 누웠다. 침대는 다행히도 따뜻했다. 불규칙적으로 낮게 진동하는 침대 표면에 바짝 귀를 대고 모로 누워 이것이 김미현의 어떤 생체 신호를 주파수로 변환한 출력값인지 추측해 보기도 했다. 겨우 그런 과정만으로도 공간과 거리감이 좁혀졌다. 몸이 데워지자 이북을 읽을 의욕도 생겼다. 보통 나는 비협조적인 관객으로 왠만해선 작가의 기대를 배신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밤의 몸들〉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다음 문장이 궁금해서 목소리에 속도를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소설은 상대와 완벽히 동일한 감각을 갖고 싶은 연인들인 ‘나’와 ‘너’의 대화에서 시작한다. ‘나’는 ‘너’의 설득에 힘입어 이른바 ‘세계선 이식 수술’을 받기로 결정한다. 달리 표현하면 ‘난소 이식 수술’이다. 난소가 인간 생체 주기를 관장하는 ‘체내 시계’이기 때문이다. 이를 집도하는 의사 ‘Dr.Drive’의 안내에 따라 ‘나’는 배를 갈라 난소를 꺼내 ‘너’의 배에 집어 넣는다. (결과는? 기회가 된다면 “몸으로”[4]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만들법한 B급 레즈비언 바디호러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 짧은 텍스트는 관객인 나의 목소리를 빌려 잠시 출현하는 혹은 침입하는 다른 ‘나’의 감각을 촉발하게 만드는 화학적 촉매로 기능한다. 침대 아니 수술대에 누운 채로 소설을 따라 읽으며 나는 내가 모르는 어떤 몸이 바로 내 옆에서 태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아니, 아니, 모르겠어? 우린 처음부터 여기 같이 누워 있었던 거야.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고개를 들자 미처 봉합되지 못한 절개부위 사이로 뜨끈한 김이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래서 나는 내 손을 내 상처 안으로 직접 집어 넣었다.”[5]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너’와의 비밀이다. 지금까지 침대에 웅크려 누운 몸들의 갯수가 곧 비밀들의 갯수다. 무한한 밤들이 낳는 무한한 비밀들. 침대는 ‘우리’의 비밀들로 질척하다.
이제야 말하지만 콜드슬립의 초대 메일을 받고 나는 전시만큼 작가 김미현이 궁금했다. 인공 성기인 딜도의 쾌락을 이미 인공 인간인 우리 존재의 중심에 두고 세계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는 폴 프레시아도의 ‘대항성’ 개념이 전시 소개에 언급되어 그렇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콜드슬립 인스타그램 계정을 염탐하며 그에 대한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김미현 대신 콜드슬립이란 비인격적 고유명사를 앞세워서 활동한다. 내게는 이렇게 저자성을 공간에 양도하는 그의 선택이 마치 개별적 개인으로서 예술가의 유일무이한 원본성이란 가치를 부정하는 결정처럼 느껴졌다. ‘제가 아니라 공간이 작가입니다’라는 일견 공손한 방식으로 말이다. 당연하지만 실제로도 공간은 예술가보다 크다. 마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거대한 위장처럼 말이다. 이미 복수적/잠재적/우연적 가능성(들)로 풍요로운 위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는 단지 이런 가능성(들)을 매개하는 기능/도구/숙주에 불과하다. 또한 공간은 심야 시간대라는 환경에 관객의 신체가 반응한 결과로서 부모 없는 사건(들)을 낳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거대한 자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의 역할은 그런 조건을 관리하는 산파겠다. 어느 쪽이든 냉동 수면을 의미하는 이름의 공간 운영자에게 어울린다. 김미현은 2021년부터 콜드슬립에서 매해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처음에는 대관료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거주해 익숙한 지역에서 자기만의 전시장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운영은 분명 다른 차원의 도전이다. 여러 작품을 통해 그는 게임처럼 특정한 배경과 인터페이스를 갖춘 환경에 관객을 초대해 환경의 일부로서 관객에게 안내와 지시를 제공하는 역할을 반복해서 수행했다. 이런 제한적 조건을 통해 관객은 자기만의 사건(들)을 발견한다. 이미 김미현이 인지하고 있듯이 이제 ‘아는’ 관객 사이에서 콜드슬립은 특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 혹은 브랜드 네임처럼 정착했다. 이 ‘특정한’ 경험을 뭐라고 분류하긴 어렵다. 다만 나는 ‘방탈출’과 같은 게임적 엔터테인먼트의 경험과 사적/고백적/일탈적 체험, 일시적 ‘해프닝’과 퍼포먼스, ‘미술’과 ‘공연’이란 견고한 범주의 경계 사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들)의 힘을 믿는 콜드슬립과 공간 운영자이자 작가 김미현의 활동을 앞으로도 실컷 궁금해 하며 지켜보고 싶다.
[1] 김미현 작가 소개에서 인용.
[2] 홍지영 개인전 〈유적지를 도는 여자들〉(관람 기간: 2025.10.15(수)—10.26(일), 관람 시간: 22:00~02:00, 장소: 윈드밀)를 가리킨다.
[3]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김미현도 조너선 크래리의 〈24/7 잠의 종말〉을 참조하고 있었다.
[4] 소설 〈밤의 몸들〉에서 인용.
[5]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