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나는 00시 25분에 입장하였다. 윈드밀은 처음이었다. 입구로 들어서서 내 이름을 말하고, 안내를 받았다. 나는 B번 출입구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 안내자 분이 알려준 곳으로 가니 승강기 앞이었다. 아까 입구 쪽에서 받았던 봉투에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주섬주섬 넣고 승강기 앞에 놓인 커다란 박스에 넣는다. 봉투에는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얼마 전에 샀고 꽤 마음에 드는 샌달이므로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됨. 맨발로 승강기에 탄다. 왜냐면 입구에 놓여 있던 회색 발싸개를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내려와보니 모두들 회색 발싸개를 신고 있었다. 왠지 나만 모자른 사람이 된 기분. 하지만 내 양말은 회색이었으므로… 괜찮다. 내가 내린 엘레베이터 쪽에 하얀 이불이 덮인 침대가 보였고, (퍼포머로 보이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걸터앉아 있었다. 침대 주변 이곳 저곳에 하얀 쿠션이 쌓여있었다. 나는 어색한 몸짓을 풀어보려 더 적극적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아야겠다 마음 먹고. 우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커다란 탁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지침이 쓰인 파일들이 놓여있다. 불면을 판정받은 침대 위의 하얀 옷 입은 이로 하여금 잠잘 수 있게 하는 지침들이고 약봉지가 끼워져있다. 파일들이 차지하지 않은 탁상 위의 다른 공간에는 달걀 모양의 회색 타이머도 놓여있고 물과 주스와 투명한 컵이 있었다. 그렇게 전시장에서 할 수 있을 법한 것(무언가를 골똘히 읽고 보는 것)을 하고나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침대와 탁상 주변은 그 공간에서 가장 밝은 곳이었다. 그래서 빨리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 〈헤테로크로니아〉가 펼쳐지고 있는 공간은 꽤나 넓고 컸다. 크게 세 곳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내가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보게 된 곳. 거기에는 아까 말한 것처럼 침대와 쿠션들이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고, 침대를 지나쳐 공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어두워졌다. 거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맞은 편 벽에 프로젝션 되는 영상이 보였다. 메모와 일기 같은 것이 쓰여진 노트가 클로즈업 되어 나왔다. 그 벽과 90도로 마주한 바로 옆의 벽에도 영상이 프로젝션 되고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두 사람의 뒷 모습, 무언가 한자로 쓰여진 비석, 흔들리는 화면 같은 것. 그 두 벽을 중심으로 한 공간에 아크릴 판들이 비교적 촘촘히 천장에 매달려 바닥 근처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관객은 절대로 영상을 완전한 시야 속에서 볼 수 없고, 영상의 전모를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영화 관객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완전한 파악을 위해 몇 번이고 노력했지만 실패. 그리고 그 공간에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보기로 함. 바닥에 하얀 종이가 관처럼 놓여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누워있었는데 그 중엔 역시 하얀 옷을 입은 또다른 퍼포머도 있었고, 관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퍼포머를 제외한 이들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음. 왠지 모르게 찜질방이 생각났다. 모르는 사람들이 철푸덕 바닥에 누워있는 광경. 굉장히 사적인 모양새로. 퍼포머는 노란색으로 염색(어쩌면 탈색)한 머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잠을 자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와서 관찰해보니 그때마다 포즈가 달라져있었기 때문. 누워있는 퍼포머의 바로 곁에 있는 벽에 바닥부터 천장을 거쳐 맞은 편 벽까지 이어져있는 글귀가 보인다. 입장권으로 받은 조그만 손전등을 딸깍- 키고 그 글귀를 비춰봄.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침대 맡의 빛도 프로젝션되는 영상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가장 어두운 곳에 도달했다. 타이피스트(나중에 공연 정보를 살펴보니 그들을 ‘타이피스트’라고 적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이 혼자 어둠 속에 놓인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 무언가를 타이핑 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 같다. 반갑지만 모르는 척 일단 지나가기로. (이 공연의 주의사항 중 하나가 ‘동반 입장을 지양’하는 것이었기에 내 딴에는 순순히 그 지령에 따르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 타이피스트를 지나쳐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니 보다 너비가 좁은 공간이 나왔고 거기도 투명 아크릴들이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벽 한쪽 아래를 살펴보니 조그만 프린터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때 발견한 또 다른 퍼포머. 흰 색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사람이 느릿느릿 자신의 공간인 것마냥 여유롭게 움직이며 벽에 손전등 빛을 비추고 있다. 곳곳에 숨겨진 글귀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글귀들은 공간 곳곳에 까만색 폰트로 인쇄되어 붙어있었는데, 그건 관객이 비춰보면 되는 것들이었지만 그 퍼포머가 비추는 글귀는 흰 색에 가까운 회색깔 폰트의 글귀들이었기에 그가 비추지 않으면 관객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글귀들은 정면으로 비추면 보이지 않는다. 너무 하얘서. 그래서 퍼포머는 글귀가 붙어있는 벽면에 손전등을 비스듬히 세우고 빛을 글귀들의 측면(?)에서 비춤으로써 그들을 보이게 만든다. 글귀들이 가진 미세한 높이가 그 빛 덕분에 보인다. 글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신기함을 느낀 관객들이 다시 퍼포머가 지나간 자리로 가서 손전등을 비추지만 글귀는 보이지 않고. 바보야,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비춰야 합니다. 그 바보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자기 퍼포머가 아크릴 판에 입김을 불더니 손가락으로 화살표를 그린다. 손가락과 아크릴 판, 그리고 입김의 습기가 만나서 끽끽 소리를 만들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뭐가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그러니깐 그 화살표가 저 글귀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것인지, 그냥 내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게끔 하려고 그려진 화살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고 그런 추측들이 모두 섞여 있는 채로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퍼포머를 따라 또 무빙. 퍼포머가 비춰주는 글귀들에 몰두하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 내 몸을 움직이다보니 마치 이건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건 영화가 아닌가? 극이 정해준 무언가를 읽고 보는 것. 카메라를 정신적으로 따라가는 것. 그렇게 다양한 어둠 속을 헤매다보니 어느 새 나는 지쳤고, 몇 번 망설이다가 쿠션을 집어들고 하얀 종이가 관처럼 놓여있던 공간으로 가 잠을 청했다. 이불을 찾을 수 없어서 팔짱을 낀 채로 누웠다. 체온을 높이려 했지만 윈드밀의 바닥은 얼음장……. 그래도 잠이 왔다. 왜냐면 공간 전체의 사운드를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퍼포머가 자장가를 틀어줬기 때문. ‘잘 자라 내 아가.’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쿠션을 들고 공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누울 곳을 찾는다. 굉장히 몽유병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스르륵 잠이 든다. ‘나는 이걸 다 보고 비평을 써야하는데… 자면 안되는데… 근데 잠을 자는 것도 이 공연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러다 생각이 끊긴 순간부터 나는 잤다. 그러다 갑자기 엄청나게 큰 소리에 깼다. 공연장 입구에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을 압수(?)당한 상태였기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피커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났고 벌떡 몸을 일으켜세웠다. 프린터가 있던 곳에서도 뭔가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가 봤다. 프린터가 종이들을 뱉고 있었고, 바닥에 뱉어진 종이들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읽고 있었다. 나도 동참. 타이피스트들은 총 세 명 있었는데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트북을 켜고 쓴 것들이 출력된 것 같았다. 프린터 위에도 무언가 소음을 일으키는 장치가 있었다. 시끄러웠다. 타이피스트들의 글을 재밌게 읽었다. 누군가는 시 같은 것을 썼고 누군가는 이 공연장의 관찰일기를 썼다. 또 누군가는 생각을, 상념을, 자신의 감각을 상세히 쓰고. 거기 있는 모든 종이들을 다 읽고 다시 일어나서 공간을 조금 돌아다녔다. 다시 한 번 영상들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 그리고 실패 뒤에 약간은 패잔병처럼 아까 잠을 청했던 공간의 마땅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소리와 사람들 등등을 구경했다. 사운드 퍼포머가 갑자기 바이올린으로 끽끽 거리는 소리를 발생시킴. 그러다 바닥에 바이올린을 질질 끌어서 또 끽끽 거리는 소리를 내고. 아까는 재우더니 이제는 깨우는 건가?  웃음이 나왔다. 한창 사운드 퍼포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소음을 발생시킴. 웃기게도 좀 짜증난다는 생각까지 했다. 왜냐면 그 소음은 사람의 신경을 완전히 긁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완전히 말려들었다! 이런 기분까지 느끼다니. 정신을 차려보니 털이 부슬부슬한 곰이 사람들과 줄지어 공연장을 한 바퀴 돌고 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반대편 벽에 몸을 기대니, 처음엔 아무 것도 없었던 벽에 뭔가가 영사및 루핑되고 있었다. 끽끽 거리는 소리는 잠시 바뀌었나? 타이피스트들을 비롯하여 다들 삼삼오오 모이거나 흩어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고. 다들 조금씩 지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공연이 끝나길 기다린다. 처음으로 다 같은 마음으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감각은 꽤나 동시대적인 것 같다. 어디서부터 ‘동시대’인지 말하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긴 하지만, 그 시작이야 어찌되었든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감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간다. 이 시대의 패널티 같달까.

〈헤테로크로니아〉는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공연이다. 관객들은 세 개로 나뉜 입구 중 본인이 공연 예매를 하며 임의로 선택한 하나의 입구로만 들어간다. 그때부터 이미 나머지 두 개의 입구에 대한 경험은 관객으로서 포기해야 한다. 공연장에 들어서도 선택과 그에 따른 포기의 경험은 계속된다. 5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입장권으로서 주어진 작은 손전등을 들고 공연장 구석구석을 나름대로 탐험해야 하지만 (물론 그러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혹은 누워서 다섯시간을 편히 보내는 방법도 있다) 그와 동시에 공연은 관객의 시야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까지도 그 모습을 바꾼다. 공연장 곳곳에 흩뿌려지듯 위치한 퍼포머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할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 ‘할 일’은 반복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매 순간이 꽤나 강도높은 고유함을 갖는다. 따라서 관객들은 공통의 체험을 거의 할 수 없다. 관객 각자의 몸은 하나고, 만약 그가 ‘여기’ 있다면 ‘저기’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며, 스크린을 중심으로 한 ‘여기’에서의 경험과 ‘저기’에서의 경험 간의 차이를 최소한으로 하고자 하는 영화관이나 극장과는 달리, 〈헤테로크로니아〉의 공간은 그 차이를 부각시키고 가속화하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몇 개의 벽에 영상이 프로젝션 되고 있었지만, 관객과 벽에 영사되는 영상 사이를 공중에 매달린 아크릴 판들이 가로막고 있어 관객은 어디에 서도 영상의 이미지를, 그리고 영상의 처음과 끝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퍼포머들은 비교적 여러 공간으로 나뉜 공연장의 부분부분을 각자 차지하며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관객은 절대로 이 공연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몸이 여러 개이지 않은 이상.

전모를 파악하기 쉬운 두 개의 장소를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자리에 고정된 사람들’의 장소(영화관)와 ‘비교적 고정된 대상’에 집중하는 ‘움직이는 사람들’의 장소(미술관). 이 두 장소에서 우리는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그렇다고 착각한다. 관객이 전모를 파악하든 말든간에 전모가 있다는 전제 또는 환상에 기반한 공간이 영화관과 미술관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다녀와서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할지언정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지는 합의조차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깐. 미술관에 해당하는 방식이 도시의 거리를 쏘다니는 산책자의 그것이라면, 영화관의 방식은 기차 혹은 자동차를 타며 차창을 바라보는 탑승자의 그것이다. (둘 다 이제 꽤나 오래된 것이 되었다.) 〈헤테로크로니아〉의 장소는 영화관에서도, 미술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무엇이다. 삼각형의 한 꼭지점을 차지할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움직이는 사람들’의 장소. 그곳에서 전모는 전제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모에 관한 힌트를 주지 않기 위해 공연은 사력을 다해 노력한다. 주체도 변하지만 대상도 변한다. 전모는 신비의 영역에 남고, 다만 모습없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자정부터 오전 5시까지, 공연이 진행되는 다섯 시간 동안 관객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걸까? 아니면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걸까? 사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같은 시간을 사는 걸까? 아예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시간을 사는 걸까?

〈헤테로크로니아〉의 공연 소개는 일치하지 않는 시간과 시차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관객들 사이에는 아주 개인적인 시차들이 발생한다. 언제나 겪고 있었지만 그동안 알아차릴 수 없었던 시차들이.”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차라는 건 사실 공통의 감각을 전제한다. ‘시간차 공격’이란 말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공격-플레이와 수비-플레이가 만드는 상황을 이르는 것처럼 시차는 공통의 기반이 되거나 기준이 되는 무언가를 전제하고 그 위에서의 차이를 관찰하고 이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헤테로크로니아〉는 오히려 그런 공통의 기반 자체를 흐뜨려트리려는 욕망을 원동력으로 갖는다. 이런 상황은 이중적인 진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적어도 특정한 날, 특정한 다섯 시간 동안 공연되는) 〈헤테로크로니아〉는 하나다. 연출가에게는 예술적인 목적과 실험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계획된 공연 자체는 평행우주를 고려하지 않는 이상 여러 개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헤테로크로니아〉는 여러 개이기도 하다. 제목 옆에 첨자가 관객의 수만큼 새로 붙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인터랙티브”(하기도)한 이 공연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전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철저히 숨기는 이 공연의 능력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로이 앤더슨의 영화를 보다가 처음 10분부터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계속 자는 관객이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영화 제목에 첨자 하나를 더 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깐, 로이 앤더슨의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가 있고,  A가 본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가 있고 B가 보다가 잔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가 있고, C가 자다가 본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가 있는 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터랙티브한 미디어 작품이 이제 막 그 작품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관객의 움직임을 반영하여 무언가를 실기간으로 시각화 해낸다고 해서, 그 작품의 제목에 첨자가 무한히 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는 다르게 〈헤테로크로니아〉는 전모를 끝없이 숨기면서 n개의 무엇으로 도망간다.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은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숨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며, 동시에 무언가가 없다고 계속해서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헤테로크로니아〉는 여느 인터랙티브 작업들처럼 전모가 없다는 확언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전모-없음의-전모’라는 함정을 피하면서도, 끝까지 전모를 숨김으로써 질적인 의미에서 다른 n개의 경험들을 만들어 낸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물품”을 “봉인”하는 순간부터 그러한 노력은 시작된 것이다. 손 끝으로 빠져나가는 n개의 〈헤테로크로니아〉.

(이 공연에서 관객은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할 수 없다. ‘2시, 3시 … 이제 5시? 곧 끝나겠군.’ 같은 감각은 애초부터 만들어질 수가 없다. 계속해서 꿈 속 같은 반쯤 멍하고 반쯤 각성된 상태가 지속될 것만 같다. 그러다 다소간 갑자기 공연이 끝나고 관계자처럼 보이는 이들이 자리를 정리하며 사람들을 출구로 안내한다. 그때서야 관객들은 공통의 경험을 한다. 끝의 순간. 끝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