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
꿈과 기억은 한쪽이 눈을 뜨면 한쪽이 눈을 감아야만 하는 두 얼굴 같아서 서로를 직시하지 못한다. 기억으로 만든 꿈에는 많은 왜곡이 있고 꿈으로 만든 기억은 금세 사라지거나 희미한 인상을 남긴다. 내게 꿈의 일부가 똑똑히 기억된다면 그건 대체로 꿈의 한복판이 아니라 끄트머리에 있는 것들을 가까스로 잡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치가 켜지듯 번쩍 깨어날 때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말, “이제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혹은 연구원 3이 “안녕히 가세요”라는 문장을 보여주자마자 갑자기 다른 곳에 도착한 것처럼 한층 더 추운 날씨 속에서 바람 소리를 들은 기억 같은 것.
가까스로 뇌리에 남아있는 꿈의 장면들마저도 꼭 닫힌 책의 표지 같아서 이를 다시 열어보려면 아주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멈춘 장면을 다시 움직여보기 위해 시선의 변화와 몸의 움직임을 되짚고, 그 움직임이 발생시킨 소리와 밖에서 들렸던 소리를 더듬어 찾는다. 내가 그렇게 움직였던 이유와 그 이유를 만든 이야기를 상기하며 이 모든 것의 연쇄고리를 추적한다. 거의 모든 꿈속 장면이 그러하듯, 콜드슬립에서 이루어진 연구원 3과의 첫 면담과 꿈 이야기를 들은 세 장소에서의 일들은 ‘그리고’라고는 말로만 이어질 뿐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연구원 3과 함께 콜드슬립 건너편의 텅빈 사무실을 바라보고 멈추어 선다. 차가운 CD가 은색 CD 플레이어에 들어가고 짧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군가의 사무실 꿈 이야기. 회의 도중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지만 정확하진 않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대낮에 벌어진 이야기가 밤이 될 때까지 사무실 언저리에 남아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꿈꾼 자가 오늘 낮에 회의했던 게 꿈에 그대로 나왔어,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재현에 가까운 꿈. 낭독하는 목소리 뒤엔 사무실에서 으레 들려올 법한 소리가 덧입혀져 있다. 사각거리는 종이 소리, 유리창을 치는 소리, 벨소리 등 익숙한 소리가 돌출된 꿈 이야기.
십 분 정도를 꼬박 걸은 뒤 연구원 3은 나를 산자락 초입에 데려갔고 우리는 작은 하천을 바라보고 멈춰선다. 차가운 CD가 은색 CD 플레이어에 들어가고 다른 짧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 위에서 정확하게 설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내가 바라보고 있던 물의 표면은 잔잔하지만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조금 더 출렁였다. 이야기 속의 날씨와 현실의 날씨가 묘하게 충돌한다. 어느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등 뒤로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이 지나간다. 등 뒤의 개가 낸 소리인지 녹음된 소리인지 판가름하기 어렵다.
어느 꿈에서였는지 자동차가 지나가자 어떤 전환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헤드폰 속에서도 자동차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도로에서 난 소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들은 것인지 꿈꾼 자가 들은 것인지 불분명한 순간이 점점 많아진다. 채널헤드가 특정한 장소에 도달해 다른 이의 꿈을 수신하는 과정에서는 점점 더 크고 작은 간섭이 발생한다. 그 간섭이 잦아질수록 이 공연의 목적이 완수된다고 느낀다. 헤드폰 안에서 들려온 소리든,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내가 낭독된 이야기 속에서 다른 소리를 상상해서 들은 것이든 어쨌든 나는 어떤 것들을 듣는다. 명시적인 이야기는 소리로 흩어져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꿈의 기분이나 꿈을 받아들인 나의 마음 같은 것만 남아있다. 으레 꿈이 그러하듯이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해도 꿈을 꿨다는 흔적이 선명히 남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길을 지나 다시 흰 방으로 돌아온다. 차가운 방에서 찬물을 마시며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은 장면들을 넘겨본다. 연구원 3의 눈동자 색깔, 헤드폰을 끼고 이야기를 듣던 나의 등 뒤를 지나간 버스, 다른 사람 집의 창문가를 바라보고 서 있었던 나와 연구원 3, 하얀 방에서 혼자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나를 바라보는 빨간 CCTV. 흰 방에서 내가 얻은 꿈에 대해 생각하다가 검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그 기억이 이미 많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인환각연쇄고리는 꿈이 작동하는 시간에 경험하게 되는 꿈 이야기고 나는 그걸 다른 공연과 같은 방식으로 기억할 수 없다. 콜드슬립은 잠들기 좋은 공간이지만 나는 지금 막 꿈에서 빠져나와 그곳에 도착했으므로 정신을 놓게 되지 않는다. 이불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꿈에 대해 생각한다. 이인환각연쇄고리에서 내가 찾도록 설계된 것은 꿈 자체가 아니라 수집된 꿈들, 음향화된 꿈들의 연결망이었고, 누구의 꿈인지는 어느 순간부터 중요해지지 않았다.
꿈은 꾼 사람의 것이지만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주거나 팔 수도 있고 두 사람이 양손에 함께 쥐고 있을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이 꿈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을 수도 있다. 연구원들은 그것을 밤에만 열리는 어떤 공간들에 가져다놓기를 택하고, 콜드슬립 인근에 구름 같은 꿈 더미를 증강한다. 연구원 3은 계속해서 그곳을 다른 이들과 매일밤 걸어다니며 그곳에 꿈이 견고하게 자리잡도록 덮어쓰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인환각연쇄고리 안에서는 꿈의 교환과 간섭과 중첩이 발생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마도 꿈의 자리를 이곳저곳에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꿈 이야기를 들었던 사무실을 지나치고, 내가 물소리를 들었던 산자락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내가 어떤 공간에 잠시 연결됐었던 것인지 생각한다. 희미한 꿈 이야기에 덧씌워져 있는 보이지 않는 연쇄고리들. 꿈 이야기에 장소를 부여하는 사운드, 음향화된 꿈을 송신할 자리, 그곳으로 안내하는 연구원 3, 그걸 듣는 사람의 불완전한 수신, 기억 속에 남지 않고 사라지는 꿈, 하지만 분명 남아있는 희미한 느낌. 이인환각연쇄고리에서 제안하는 관계와 거기서 겪게되는 모든 경험적 사실은 당시엔 명료했고 지당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인과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다. 꿈을 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꼭 이인환각연쇄고리 안에서만 발생하는 일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