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형 몽유록의 지극히 아름다운 가상 안에서
-콜드슬립의 제4차 「이인환각연쇄고리」(2022)에 참여하고 나서
고전적인 서사 유형들 중 하나로 여행담이 있다. 여행 이야기들에서 여행지는 지리상 실존하는 장소이거나 실제를 사실주의적으로 모방한 장소일 수도 있지만, 오로지 환상적인 상상으로 지어낸 순전한 허구의 장소인 경우도 많다. 신화에서는 자발적으로 이러한 상상의 장소를 찾아 떠나거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피치 못하게 그곳에 다다르게 되는 여행담이 가득하다.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에서 이타케의 왕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칼륍소의 동굴, 나우시카의 섬, 그리고 키르케의 섬을 떠돌며 바닷길에서 몇 년을 보낸다. 이 동굴과 섬들을 지중해 지도에서 찾아보기란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예로, 기독교는 사후의 세계를 천국, 연옥, 지옥으로 위계화하는데, 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는 아무도 없기에, 이야기꾼들은 이처럼 실체도 없고 증언도 없는 세계의 풍경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꾸며내는 수밖에 없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이 그렇다. 우리에게 가까운 예로는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파노라마가 진행되면서, 첩첩산중의 암벽에 꽃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골짜기에 사람 사는 마을과 나루터가 오밀조밀하게 펼쳐진다. 그러다 화첩의 마지막 몇 폭에서 더 이상 사람 사는 흔적 없이 야트막한 섬들만 운무 아래 바다에 떠 있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림 속의 풍경은 당대 조선의 실경산수가 아니다. 인간이 이승에서의 삶을 굽이굽이 이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이르게 되는 말년과 죽음의 시각화일 수도 있고, 세속의 것들을 하나둘 떨치며 도달하는 예술적 이상향일 수도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실제 세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상이다.
특정 작가와 예술가만 이러한 환상적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꿈이라는 독특한 정신 작용을 통해 의식이 활동하는 동안에는 전혀 의도하거나 생각하지도 못한 가상의 사건을 겪는다. 꿈속의 가상 세계를 만드는 주체는 꿈꾸는 사람 자신이다. 꿈을 꾸는 이상 우리는 모두 가상 세계의 창작자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여행담은 다른 고전적 서사 형식인 몽유기와 만난다. 꿈속 가상계로의 여행을 기록하면 누구나 몽유록의 저자가 된다.
현실 세계의 지형지물에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 우리는 낯섦의 공포를 극복하고 그 장소를 지배하기 위해 지도나 GPS를 이용한다. 신화적 세계관이 수세대를 통과하며 인류의 공통 유산으로 확정되면, 그것은 일종의 독립적인 대륙처럼 간주되어서 상상의 지도가 제작되기도 한다. 단테의 묘사를 충실하게 재현한 보티첼리의 지옥도가 그 예이다. 그럼에도, 가상 세계에는 구체적인 참조점이 없으므로 언제나 막연한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고, 그것은 영원히 낯설 것이기에, 지도는 완벽한 의지처가 될 수 없으며 많은 경우 아예 불가능하다. 이때 가상 세계의 여행자는 안내자를 소환한다. 자기보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 의지하여 가상계의 여행을 떠난다. 다시 『신곡』의 예를 들면, 베르길리우스의 뒤를 고분고분 따라가며 지옥을 둘러보는 단테가 바로 그렇다. 죽은 자를 절대적 미지의 세계인 명계로 인도하는 카론의 뱃사공도 안내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콜드슬립의 「이인환각연쇄고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무대 세팅과도 같은 서설이 길었다.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참조한 까닭은, 그만큼 이 공연이 가상계의 여행담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서사 형식이자 유구한 문화 유산의 범주 안에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을 동시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곳곳의 신비가 차차 풀려나가고, 그리하여 인간이 개발한 광학기기가 그것의 시선이 닿는 모든 장소를 지도화하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꾸고, 꿈에서는 여전히 기묘한 가상의 공간이 생겨난다. 「이인환각연쇄고리」에서 녹음 장치, 웹페이지, CCTV, QR코드, 스마트폰 같은 현대의 일상적인 기술은 꿈속의 가상을 실증할 수 없는 헛것이라 물리치는 대신 오히러 그것을 증언하고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 인간은 가상을 억압하고 사실을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가상을 더 장려하여 마침내 그것이 현실을 압도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도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2022년 9월 24일 밤 11시에 서울 인수봉로 301번지에 위치한 콜드슬립에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이인환각연쇄고리」에 관해 아는 것이 그다지 없었다. 기술적인 것들에 취약하기에 콜드슬립 연출자가 미리 보내온 메일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공연을 감상하려면 헤드셋을 써야 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인지했을 따름이다. 난해한 대상을 앞두고 나는 차라리 아예 무지하기를 택했다. 무모한 모험심이 발로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바로 「이인환각연쇄고리」의 모호한 초대장이 유발하는 효과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든 자기를 그저 내맡겨 보려는 무구하고 무지한 용기를 갖춘 다음에야 「이인환각연쇄고리」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연 연출자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전제한다. 「이인환각연쇄고리」는 본 공연에 앞서 연출자와 참여자 사이에 이처럼 환대와 신뢰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 우리 중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로서 위태롭게 생존할 뿐인데, 「이인환각연쇄고리」에 참여하는 그 순간만큼은, 방어적 지식과 태도로 무장하는 대신 무구하게 헐벗은 상태에서도 현실에서 보장받지 못하는 안전의 권리와 쾌락을 누리며 바깥의 밤으로 침투하는 여행을 함께 떠나는 것이다. 눈물이 솟구칠 만큼 놀랍고 벅찬 미적 체험이다.
나는 혜화에서 지인들과 함께 있다가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혼자 자리를 떠서 콜드슬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게 서울 북부에 대한 지식의 한계선은 한성대 입구까지였으므로, 버스를 타고 나서 몇 정류소를 지나자마자 나는 이미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여 주행하고 있었다. 몰입형 공연으로서 「이인환각연쇄고리」는 장소 특정적임과 동시에 시간 특정적인데, 산업과 노동의 도심에서 멀어져서 산과 계곡에 가까운 북쪽으로 갈수록, 밤이 늦어질수록, 인기척과 차량은 점차 줄어들고, 그만큼 참여자에게는 현실과 낯선 꿈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콜드슬립에 도착하면, 연구원3이라 명명된 연출자와 채널헤드라 명명된 참여자의 무언의 이인극이 비로소 시작된다. 참여자는 「이인환각연쇄고리」의 내용과 진행 방식에 아무런 사전 정보를 갖추지 못함은 물론이고 몰입형 연극이 무엇인지조차 전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무지가 온전할수록 이 공연에서 체험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은 역설적으로 더욱 고양된다. 「이인환각연쇄고리」는 연출자와 참여자가 안내자와 초심자로서 꿈속의 낯선 세계를 거닌다는 몽유 여행담의 형식을 따르는데, 꿈속에서 어디를 떠돌게 될지, 어떤 사건을 겪을지, 미리 알고 꿈을 꾸는 사람은 없으므로. 오로지 깨어난 후에야 덧없이 사라진 가상의 여운과 가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약간의 신체적 피로가 혼융하여 벅찰 뿐이므로.
참여자는 안내자를 따라 밤의 바깥으로 나온다. 헤드셋으로 제1차부터 제3차까지의 연쇄고리 공연을 통해 다층적으로 녹음된 몽유록을 들으며, 꿈의 내용과 막연하게 겹치는 장소들로 밤 산책 같은 여행을 떠난다. 북한산 언저리의 수풀과 시냇물, 어둠 속에서도 차이가 분간되는 대규모 저택 단지와 허름한 빌라촌, 창문을 통해 새나오는 조명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생활의 모습들, 평탄한 골목과 때로는 비좁고 울퉁불퉁한 산길... 연출자는 콜드슬립 근처 북한산 일대에서 수십 년 넘게 거주했으므로 장소 특정적인 밤과 꿈의 여행에 이보다 더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안내자는 없을 것이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 안내자는 참여자에게 눈을 완전히 감고 그저 자기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것을 제안한다. 참여자는 기꺼이 따르는 수밖에 없다. 지시 사항에 복종하려고가 아니라, 미지의 타인을 향한 무한한 신뢰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건인지 한 시간 반 남짓한 몽유 기행 동안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에, 완벽한 어둠과 타인의 손에 자기를 순전히 내맡긴다.
「이인환각연쇄고리」는 여러 겹의 부정성으로 에워싸인 공연이다. 무지와 무모와 무언으로. 알 수 없음에서 시작하여, 말 없음 한가운데 용감하게 몰입하며 진행되고, 말할 수 없음으로 마무리된다. 겪기 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안내자의 초대장은 모호한 비밀처럼 전달될 수밖에 없고, 참여자는 공연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이 체험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부정들을 통과하여 비로소 다다르게 되는 환대와 신뢰의 시공간에 관하여 벅차서 솟는 눈물과 더듬거리는 말투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어수룩한 신체의 증상과 어법에서 새나오는 미의 기미를 누군가 감지하여 이 몰입형 몽유록의 확장에 언제든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